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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
세모아
2009. 9. 8. 23:15
출처: http://blog.naver.com/jwkang17?Redirect=Log&logNo=100007121635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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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2004년 10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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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코너입니다.비트컴퓨터 조현정 사장의 영화같은 사업이야기는 잘 보셨는지요. 지독히 가난했던 청년기의 고단한 삶속에서도 청운의 꿈을 잃지않고 결국 성공의 반열에 오른 조 사장의 창업기는 성공의 열쇠는 역시 환경이 아닌,‘불굴의 의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조 사장이 바통을 넘긴 92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은 비슷한 성공기를 갖고있는 주성엔지니어링의 황철주 사장입니다. 조 사장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다국적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는 대단한 CEO입니다.초심을 잃지않는 모범적인 CEO입니다” 두 사람은 인하대 전자공학과 동기생입니다.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10년 넘게 사업을 하고 있는 베테랑 CEO라 그런지, 관심사도 스타일도 비슷합니다. 주성엔지니어링 황철주(46)사장이 어떤 면에서 대단한지,그의 사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벽면을 가득채운 액자는 너무 많아 셀 수 조차 없다.이 회사가 갖고있는 특허건수는 무려 570건. 국내 벤처기업 전체 특허건수의 무려 15%에 이르는 수치다. 로비와 계단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특허출원액자는 창업 10년만에 세계적 1,2위 반도체,LCD장비업체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는 주성엔지니어링의 기술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세계 반도체,LCD용 장비시장의 20%를 점유하며 글로벌기업으로 우뚝 올라선 보기드문 초우량 일류기업이다. HSG 란 저압CVD(화학증착장치)란 반도체장비분야에서 세계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LCD용 CVD장비를 비롯해 반도체 전공정장비시장에서 세계 1,2위 기업인 AMAT,TEL사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메모리에 ‘삼성전자’가 있다면, 반도체장치분야엔 ‘주성엔지니어링’이 있는 셈. 황 사장은 매우 겸손하고 침착한 스타일이다.10년차가 넘는 CEO지만,엔지니어의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있다.경영수완은 베테랑 CEO답게 노련하기 그지없다. 기술과 시장,고객사의 니즈등에 관한한 누구도 넘볼수 없는 탁월한 지식과 식견을 자랑한다.그 역시 극심한 부침속에 이른바 산전수전 다겪은 경영인이다. 주성엔지니어링은 96년 설립된 반도체 전(前)공정장치인 CVD장비 개발 벤처기업.CVD란 회로설계를 위해 웨이퍼기판에 화학물질을 증착하는 공정을 말한다. 올해 상반기에만 이미 1,025억원의 매출에 당기순이익 280억원을 달성,창사이래 최대 실적을 냈다.올 한해 1600억원의 매출에 30%대의 경상이익율을 내다보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 준비된 운명,29살의 결단 “앞으론 네덜란드 본사 엔지니어를 부르지 마세요.대신 황철주 씨가 운영을 맡아주세요” 90년초,황철주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삼성전자의 제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삼성이란 세계적 반도체회사가 본사 엔지니어가 아닌,국내 지사 기술지원엔지니어인 자신을 장비운영 책임자로 맡긴다는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 황철주는 시골 빈농의 2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절대 빈곤속에 청소년기를 보낸다. 공고에 이어,공업전문대에 입학한 것도,편입한 4년제 대학을 몇 년이 지나서야 졸업한 것도 경제적 상황때문이었다. 황철주는 85년 현대전자에 입사,‘반도체’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여느 젊은 직장초년병과 달랐다. 당시 29세였던 황철주는 입사 8개월만에 퇴사를 결심한다. 반도체생산라인에서 일을 했던 황철주는 장비공급 외국사들이 현대전자 엔지니어에 대해 반도체장치에는 절대 손도 못대게 하는 상황에 주목했다. 양산라인 엔지니어인 그가 하는 일은 외국장비회사 엔지니어가 방문하면 안내하는 게 고작이었다.그는 이런 독특한 기술적 폐쇄성에 뭔가 도전해봄직한 일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반도체장비가 바로 자신이 도전해야할 분야라고 마음먹는다. 85년말,황철주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ASM이란 네덜란드 반도체장비업체로 자리를 옮긴다. 놀라운 것은 ASM국내 지사도 아닌,영업대리점 직원으로 입사했다는 점. 게의치 않았다. 그는 여기서 반도체장비 기술지원엔지니어로 일한다. 새로운 장비를 팔면,고객사에 장비를 설치해주고 A/S 등 유지관리를 해주는 일이었다.주로 취급한 장비는 화학증착장비인 PE CVD,LP CVD,확산로 등이었다. 황철주는 ASM사의 화학증착장비를 배우기위해 미친듯이 일했다.하지만 그에겐 일 같은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어느날 꾀를 냈다. 외국 엔지니어가 자리를 비운틈을 타 장비에 고장을 낸 것.외국 엔지니어가 며칠밤을 새며 애쓰다 포기하면, “내가 한번 고쳐보겠다”고 나선 것.이렇게 몇번 고치고 난후부터 국내 반도체업체들이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그는 ASM에 입사한후 무려 10년간 주말도 없이 일에 매달린다.그가 훗날 국내 반도체장비분야의 일인자가 될수 있었던 것은 이런 오랜기간의 집념이 있었기 때문. 유명한 에피소드 하나.황철주는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서초동 정류장에서 기흥공장으로 출발하는 삼성전자 출근버스에 오른다.저녁 10시면 또다시 기흥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퇴근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런 생활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7년간이나 이어졌다.모두가 그를 삼성전자 직원쯤으로 생각했다.그의 스케줄은 고객사 일이 있건 없건, 매일 새벽 6시 40분쯤 삼성전자 기흥공장으로 정해져 있었다. 매일 장비를 살펴보고,고객사 주문사항 및 반도체생산공정의 변화를 빠지지 않고 점검했다. 하지만 장비 핵심기술에 쉽게 접근할수 없었다.본사는 보안에 철저했고,지사 현지직원에게 기술을 공개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황철주는 포기하지 않았다.그는 장비설치,AS에 그치지 않고 기술분석을 하기 시작했다.닥치는대로 기록하고 분석했다.그가 남긴 기록은 실로 엄청났다.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는 황철주가 ASM에 근무하며 10년간 작성한 자료의 양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그가 작성한 자료는 무려 작은 트럭 한대분. 90년초,황철주의 기술력을 눈치챈 삼성은 양산라인장비를 ASM본사 엔지니어가 아닌 황철주에게 맡기는 실로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른 것.
◆ 혼을 담은 승부, ‘반도체장비 최고수’로의 등극 반도체장비 분야에 관한한 황철주는 국내 원조로 통하는 인물이다.반도체,LCD업계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얘기다. 입사한지 4년이 넘어서면서 황철주는 이미 본사 엔지니어들을 훨씬 능가하기 시작했다.기술분석과 고객사의 니즈를 파악하는 능력은 본사 엔지니어와는 비교할수 없는 정도였다. 91년께부터는 고객사의 요청에 따라 혼자서 장비를 설치하고 안정화,유지관리업무를 척척 처리했다.황철주의 기술력은 이미 세계 최고수준의 경지에 올라있었던 것. 예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황 사장에게 대해서는 ASM본사차원에서 그에게 만큼은 본사연구소를 오픈한 것.황철주는 그 덕분에 ASM사 일본연구소내에서 공동으로 연구를 하고,실험을 할수 있게 됐다. 황철주는 이때부터 새로운 장비개발 및 새로운 공정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이른바 반도체장비분야의 톱엔지니어로서 급부상하게 된다. 특히 그는 고객사가 원하는게 뭔지,경쟁사와 자사 제품의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분석,본사에 보고하는 핵심적인 일을 다년간 진행하게 된다. 이러다보니,황철주는 고객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공정이나 장비개발방향,수많은 회사장비의 장단점 등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이런 놀라운 감각과 치밀한 분석자료는 훗날 주성엔지니어링 성공신화의 결정적인 밑거름이 된다. 하지만 제품개발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그의 보고서는 늘 무시되기 일쑤였다. “본사에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반도체인프라 시장에 대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 훗날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세계시장을 주도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하지만 상황은 황철주의 예상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일이 주도하던 세계 반도체,LCD시장은 96년이후 한국주도로 빠르게 재편된 것. 결국 고객의 니즈를 제때 반영하지 못한 ASM사는 개발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만다.결국 PE CVD 세계시장점유율 3위를 기록했던 ASM사는 급기야 20위권으로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번번히 의견이 무시되자,황철주는 심한 좌절을 느끼기 시작했다.설상가상으로 93년말,판매실적이 저조해지면서 ASM이 국내에서 철수를 하기에 이른다.홀로서기는 어쩔수 없는 수순이었다. 93년 중반,황철주는 개인회사를 세워 반도체장비 개조 및 업그레이드에 나섰다.호구지책이었다.고객사들은 믿고 맡겼다.1년간 짭짤하게 돈을 벌었다. 운좋게도 사업밑천 할 정도인 몇 억원을 모을수 있었다. ◆ 가슴벅찬 도전, 대결단의 순간 95년초,황철주는 삼성전자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미국 베리안사,한국의 아펙스,그리고 황철주 개인 3자 컨소시엄형태로 새로운 CVD공정장비를 개발해달라고 주문한 것. 삼성이 그의 기술력을 어느 정도 높게 평가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7개월간 매달린 끝에 납품했다.대성공이었다.자신감이 생겼다.내친 김에 법인을 설립했다.95년 6월,수원시내 ‘팩토리월드’란 아파트형공장에 사무실을 냈다. 하지만 자금이 없었다.통상 새로운 양산라인용 반도체장비를 개발하기 위해 소요되는 개발비는 50억원규모. 황 사장은 고민끝에 미 지너스사를 찾아갔다. “지 너스가 시장을 전부 빼앗긴 것은 당연한 결과다.왜냐하면 지너스 장비는 1개의 장비가 1개의 공정을 처리하는 반면 경쟁사제품은 2,3개의 공정을 소화한다.지너스제품에 주성의 기술을 합치면 1개 장비로 2,개 공정을 처리할수 있다” 황 사장의 놀라운 진맥과 대안에 지너스사 담당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당시 텅스텐실리사이드 공정분야 반도체장비시장에서 세계 1위를 하던 지너스사는 경쟁사인 A사에 시장을 다 뺏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너스사는 그 자리에서 주성엔지니어링의 장비를 OEM으로 납품받아 조립해 한국시장에 판매키로 전격 결정했다.96년,황 사장은 지너스를 통해 처음으로 삼성전자 양산라인에 장비를 납품하는 행운을 거머쥔다.돈도 제법 벌었다. 두번째 행운이 이어졌다.삼성전자가 반도체장비 국산화개발비를 지원해주겠다고 나서 것.산자부에서도 반도체장비국산화를 위해 자금지원을 해준 것.지원금 5억원을 포함,토탈 10억원의 개발자금을 확보했다. 턱없이 부족한 자금이었지만 황 사장은 자신있었다.지너스와 결별하고,독자개발에 승부수를 던졌다.주성이 반도체장비전문기업으로 자리를 잡는 결정적인 행운이 다시한번 찾아든다.또다시 삼성전자였다.
◆ 질주본능, 황철주의 승부수 “좋습니다.3개월간 장비를 사용하세요.대신 우리가 필요한 공정을 반드시 개발해야 합니다” 97년초,황 사장은 날아갈듯이 기뻤다. 공교롭게 삼성전자 양산라인에 설치돼 있는 CVD장비 1대를 3개월간 놀려야하는 상황이 발생,주성이 3개월간 이 장비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삼성으로부터 허락받았기 때문. “새로운 공정을 개발하고,장비를 개발하려면,기존 반도체장비를 갖고 온갖 실험을 해야 합니다.기존 장비가 있어야 또다른 공정을 개발할수 있거든요.당시 우리같은 회사는 그런 환경을 꿈도 꿀수 없는 상황이었죠.정말 대단한 기회였죠” 당시 삼성은 CVD에 대한 새로운 공정을 시급히 개발해야하는 상황이었다.3개월간 불철주야 개발에 매달렸다.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거 의 혼자서 3개월만에 새로운 반도체장비를 개발해낸 것.통상 새 장비 한 모델을 개발하는 3년이 걸리는 장비산업계에선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10년간 트럭 한대분의 자료를 작성했던 그의 집요한 역사가 만들어낸 기적같은 일이었다. 바로 주성의 최대 효자상품이 된 HSG 장비였다.HSG는 이미 황 사장 머리속에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오던 제품이었다.연구소에 2년간 테스트해야하는 통상의 과정을 생략한채 HSG장비는 곧바로 양산라인에서 테스트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만큼 뛰어난 성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경우는 전세계 반도체 역사상 정말 유일무이한 케이스였습니다” 주성은 그해 97년말,삼성전자 연구소에 대당 30억원을 받고 당당히 HSG장비를 납품했다. 곧이어 LG반도체,현대전자 등에 줄줄이 납품되면서 수십대가 팔려나갔다.사업첫해인 96년,20억원를 기록한 매출액은 매년 두배 이상 늘어났다. 주성엔지니어링은 98년부터 HSG가 양산용으로 납품되기 시작하면서 98년부터 매출규모가 200억원대로 수직상승했다.그리곤 2000년에는 HSG 한 아이템으로 연간 5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주성은 HSG 장비를 통해 반도체장비업체로 확고하가 자리를 잡았다.놀라운 것은 세계 1,2위 기업 외산제품보다 오히려 15% 비싸게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 “반도체라인에서 장비 하나 잘못 선정하면 라인전체에 문제가 생깁니다.때문에 반도체회사들은 최고 품질의 제품만을 고집합니다.기술이 떨어지거나 명성,실적이 없으면 절대 채택하지 않습니다” 그 의 생존전략은 정면승부. “우리보다 100배쯤 큰 세계 1,2위 기업인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스나 일본 도쿄일렉트론 같은 회사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술차별화밖에 없습니다.가격으로 이길 생각은 절대 안합니다.기술을 차별화해 가격을 올려받는다는게 저희들의 전략입니다” 이들 기업과 당당히 겨뤄 미 IBM,일본 도시바 등에도 납품했다.99년 12월,주성엔지니어링은 코스닥에 입성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다. 공모가가 당시 사상최고수준인 5000원기준 34만원을 기록,화제를 뿌리며 1,100억원의 공모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 인고의 세월,황철주의 좌절 2001년 중반,황 사장은 주고객인 S사로부터 거래중단통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한동안 할말을 잃었다.ASM에서 10년간,그리고 창업해 5년여간 매일같이 살다시피한 S사 반도체 양산라인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렇게 끝나는구나”하는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았다.한동안 온갖 루머와 음해성 소문에 시달리던 황 사장은 이때부터 냉혹한 비즈니스의 세계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된다.황 사장의 시련은 벤처열풍의 후폭풍이었다. 2000년초 주성의 시가총액은 무려 3조원에 육박했고,황 사장 개인 시가총액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 이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업공개후 회사의 시가총액이 뛰고,개인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황 사장은 생애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산이 너무 높았던 탓일까? 온갖 모함이 이어졌다.세무감사를 1년에 무려 5번이나 받았을 정도였다.해외 자금도피설 등 온갖 터무니없는 음해성 루머들이 꼬리를 물었다.S사 공급중단건은 주성의 침몰을 예고하는 치명타였다. 새로운 장비개발에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공모자금으로 확보한 1,100억원과 그동안 장비판매를 통해 번 1,000억원등 총 2,000억원이 넘는 자금이 공장설립을 포함,고스란히 장비개발에 투입됐다. 매 출이 격감하면서 99년 이후 3년간 누적적자가 1,000억원을 넘어섰다.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반도체 불경기로 국내 시장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았다.2000년부터 LCD용 PE CVD개발에 착수하면서 개발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황 사장,대표이사만 바뀌면 주성은 다시 살아날수 있다는게 대부분의 생각인 듯합니다” 주주들의 압력이 갈수록 거세졌다.견디기 힘든 고통에 몇 개월째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황철주는 2001년중반,중대한 결심을 한다. 모두가 원하는만큼 경영권을 넘기고 깨끗이 물러나기로 마음먹은 것.직원들에게 알리고 외국계 4개 회사와 합병협상을 시작했다.협상조건은 상상이하였다. “정말 거저 먹을려고 하더라구요.회사가 어려워지고 온갖 나쁜 소문이 돌자,다들 그냥 공짜에 인수할수 있을 걸로 생각하더라구요.정말 기가 막혔죠” 독자적인 원천기술,확실한 제품군을 갖춰 성공을 자신하고 있던 황 사장은 울분을 삭히지 못했다.몇 개월째 외국회사를 찾아다니던 황철주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거저 넘길 바야에 자신이 다시 시작하는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2002년초,황철주는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다시 창업초심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도 어쩔수 없이 수순이었다.하지만 2년여에 걸친 최악의 상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주성엔지니어링의 체질을 180도 바꿔놓는다.해외시장 영업이 물꼬를 트면서 거친 생존본능을 터득하기 시작한 것. 실 제 황 사장은 최근 3년간 일년의 절반을 해외에서 지낼 정도로 해외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회사가 확 달라졌습니다.이젠 어떤 전쟁터에 나가도 죽지않고 살아남을수 있는 자신감이 있죠” 지나고 보니,정말 엄청난 전화위복이었다고 황 사장은 술회한다. 끝없이 추락하던 주성엔지니어링은 2002년 LG필립스가 LCD공정용 CVD장비를 구매해주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LG필립스에 이어 대만 LCD회사들이 잇따라 주문,대당 100억원씩에 줄줄이 판매되기 시작한 것. LCD 산업의 호황세에 힙입어 주성엔지니어링은 올해 LCD분야에서만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지옥같은 터널이 지나고 보니 더없는 행운이었습니다” 한순간에 국내시장을 잃게된 시련은 결과적으로 회사의 글로벌화를 재촉한 일등공신이었던 것. ◆ 황철주의 성공론 그가 내세우는 성공론의 핵심은 비즈니스에서의 ‘우선순위론’. “중소기업 CEO들은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기술은 사업을 함에 있어 기본입니다” 오히려 기술보단 마케팅이 중요하다는게 그의 지적. “사업을 해보니,처음엔 기술,몇 년 지나면 마케팅이 중요하다고 느끼고,또 몇 년 겪으면 조직관리,사람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결국 사람입니다” 두번째는 ‘신뢰’란다. “조그맣게 돈버는 것은 혼자할수 있지만,그보다 커질려면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지원세력이 많아야하는데 이는 신뢰에서 가능합니다” 상당수 벤처기업이 도중하차하는 것은 이 때문이란다. “수많은 기업들이 성공기반을 다진 1단계에서 무너지는 것은 방해세력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도와주는 세력이 많지만,어느정도 알려지면 시기하고 죽이려는 방해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게 비즈니스의 세계라는 것. 결국 방해세력을 줄이고,도와주는 세력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는 기업만이 성공할수 있고,그런 방법의 첫번째 단추는 CEO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황 사장이 사업초기부터 지금까지도 아는 고객에 대해 한달에 한번 편지를 보내고,3개월에 한번씩 책을 선물로 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늘 당당하라고 주문한다. 엔지니어는 거짓말을 하면 안되고,특히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당당하게 오픈할수 있어야한다는 그의 철칙. “사기는 한 두사람을 대상으로 치기 때문에 피해는 미미합니다.하지만 엔지니어가 사기를 치면 피해는 엄청나죠” 황 사장은 그래서 가장 잘못된 엔지니어는 가장 비겁한 사기꾼이라고 단정한다.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한지 10년만에 주성엔지니어링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궈낸 황철주 사장.그는 반도체,LCD시장의 판세를 한눈에 꽤차고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글로벌기업의 성공 CEO로 우뚝서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황철주 사장의 개인적인 꿈은 직원들에 대한 복지를 세계최고 수준으로 해놓고 은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직원들에게 대해 세계에서 잘해주는 것이 목표이고 이를 달성하면 미련없이 은퇴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